1762년(영조 38년) 음력 윤5월 13일, 조선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어요.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나무 궤짝)에 가두라고 명령했어요. 세자는 그 안에서 8일을 버티다 숨을 거뒀어요.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고 해요.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영조(재위 1724-1776)는 조선 역대 왕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고 탕평책으로 당쟁을 완화한 군주예요. 그런데 아들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어긋났어요.
사도세자는 두 살에 세자로 책봉됐어요. 영조는 아들에게 끊임없이 학문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영조의 기대는 가혹하리만큼 높았고, 사도세자는 아버지 앞에만 서면 극도로 긴장했어요. 밥도 못 먹고 실신하는 일도 있었어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심한 불안 장애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세자의 이상 행동
20대에 접어들면서 사도세자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졌어요. 옷 입기를 거부했어요. 옷을 수십 벌 꺼냈다가 버리는 일이 반복됐어요. 궁녀와 내시를 함부로 죽였다는 기록도 있어요. 궁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기도 했어요.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 「한중록」에는 이런 행동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요.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정신질환(조증·공황장애 등)의 증상으로 해석하기도 해요.
노론의 공격과 나경언의 고변
사도세자를 둘러싼 정치적 공격도 거셌어요.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은 사도세자와 가까운 소론·남인 세력의 부상을 경계했어요. 사도세자를 실각시키면 자기들의 권력이 유지된다고 판단했어요.
1762년, 나경언이라는 하급 관리가 영조에게 고변서를 올렸어요. 사도세자의 비행을 28가지나 열거한 문서였어요. 세자가 평안도에 몰래 다녀왔다는 내용, 살인 내용 등이 담겼어요. 영조는 이 고변으로 결단을 내렸어요.
뒤주 속의 8일
영조는 세자를 직접 불러 자결을 요구했어요. 세자가 거부하자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게 했어요. 세자를 뒤주 안에 넣고 못을 박아 잠갔어요. 때는 한여름이었어요.
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와 아내 혜경궁 홍씨가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세자의 어린 아들(훗날 정조)도 현장에 있었어요. 영조는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어요. 8일 뒤,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서 숨졌어요. 당시 나이 28세였어요.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어요.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뜻이에요.
정조의 복수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은 1776년 즉위해 정조가 됐어요. 정조는 즉위 첫 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어요. 아버지를 죽인 세력에 대한 복수를 예고한 거예요.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전해 현륭원이라 하고, 수원에 화성을 건설했어요.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벽파 세력과 평생 싸웠어요. 법적으로 아버지를 복권시키지는 못했지만(그러면 영조의 결정을 부정하는 꼴이 됐으므로), 실질적으로 명예를 회복시켰어요.
사도세자는 1899년 고종 때 장조(莊祖)로 추존돼 공식적으로 왕의 지위를 얻었어요. 137년 만의 복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