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가 폭풍을 일으켰다”, “마녀의 저주로 소가 죽었다”.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이런 고발 하나로 수만 명이 죽었어요. 실제 마녀는 없었어요. 두려움과 편견, 그리고 권력이 만들어낸 집단 광기였어요.
마녀 사냥의 배경
마녀재판이 본격화된 15세기는 유럽이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어요. 흑사병이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가고, 백년전쟁이 이어지고, 종교개혁으로 교회 권위가 흔들렸어요. 사람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악마와 마녀에서 찾으려 했어요.
1484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마녀 색출 교서를 발표했어요. 1487년에는 두 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의 망치)」을 출판했어요. 마녀를 어떻게 찾아내고, 심문하고, 처형하는지 담은 교본이었어요. 구텐베르크 인쇄술 덕분에 이 책이 빠르게 퍼졌어요.
누가 마녀가 됐나
마녀로 몰린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여성: 전체 희생자의 75-80%가 여성이었어요. 당시 여성은 “이성보다 감정에 지배받는다”, “남성보다 악마에 취약하다”는 편견의 대상이었어요.
노인: 특히 혼자 사는 노파가 표적이 됐어요. 허브 치료를 하는 산파나 치료사도 마녀 혐의를 받기 쉬웠어요.
경제적 약자: 부유한 이웃의 재산을 노린 고발도 있었어요. 마녀로 처형되면 재산이 몰수됐어요.
심문과 자백
마녀 혐의자가 생기면 심문이 시작됐어요. 문제는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이었어요. 고문이 공식 심문 도구였어요. 수면 박탈, 손발을 묶어 물에 집어넣기, 불에 달군 쇠 사용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됐어요.
“마녀라면 물에 빠지지 않는다”는 물 재판도 있었어요. 물에 던졌을 때 뜨면 마녀, 가라앉으면 무죄. 무죄면 이미 물에 빠져 죽어있는 거예요. 어떻게 해도 살기 어려운 구조였어요.
고문을 버티지 못해 자백한 피의자는 대개 “공범”도 대라는 요구를 받았어요. 한 사람이 이웃 여러 명을 끌어들이면서 재판이 확대됐어요.
세일럼 마녀재판 – 1692년
마녀 사냥의 대표적 사례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이에요. 1692년, 소녀 몇 명이 발작 증세를 보이며 이웃 여성들을 마녀라고 지목했어요. 공황이 퍼졌어요.
5개월간 200명 이상이 체포됐고,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어요. 1명은 돌에 눌려 죽었어요. 그러다 지역 유지 아내가 마녀로 지목되자 비로소 주 총독이 재판을 중단했어요.
세일럼은 권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멈춘 마녀 사냥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 잘 보여줘요.
계몽주의와 종식
17세기 후반, 계몽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마녀재판은 줄어들었어요. 자연 현상에 초자연적 원인을 붙이지 않게 됐어요. 고문에 의한 자백은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도 커졌어요.
유럽 마지막 법적 마녀 처형은 1782년 스위스에서 있었어요. 그것으로 약 300년간의 마녀 사냥이 끝났어요.
총 희생자는 4만~10만 명으로 추정해요. 수백만 명을 죽였다는 과거의 주장은 과장이었어요. 그래도 수만 명의 무고한 죽음이에요. 이 역사는 집단 공포와 편견이 얼마나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교훈으로 남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