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 개혁과 쇄국의 두 얼굴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63년 아들 고종이 즉위하면서 섭정을 맡았어요. 고종이 12살에 즉위했으니 아버지가 대신 권력을 행사한 거예요. 10년간(1863-1873)의 집권 기간 동안 그는 조선을 안팎으로 뒤흔들었어요.

내부 개혁 –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대원군이 먼저 손댄 건 서원이었어요. 서원은 성리학 교육 기관이면서 동시에 붕당(정치 파벌)의 근거지였어요. 전국에 수백 개가 난립해 면세 혜택을 누리며 국가 재정을 갉아먹고 있었어요. 대원군은 전국 60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어요. 유림(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강행했어요.

경복궁 중건도 추진했어요.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0년 넘게 폐허로 있었어요. 대원군은 이를 재건해 왕실의 위엄을 세우려 했어요. 그런데 비용 마련 방법이 문제였어요. 원납전이라는 사실상 강제 기부금을 거뒀고, 당백전(기존 화폐의 100배 액면가)을 발행했어요. 당백전 남발은 물가를 폭등시켜 민심을 잃는 원인이 됐어요.

천주교 박해 – 병인박해

대원군 집권 초기에는 천주교에 상대적으로 유연했어요. 프랑스 선교사를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외교 구상도 있었어요. 그런데 협상이 무위로 돌아가자 1866년 대규모 천주교 박해를 단행했어요(병인박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됐어요.

이에 프랑스가 보복에 나섰어요. 같은 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어요(병인양요). 조선군은 프랑스군의 화력에 맞서 싸웠고, 결국 프랑스는 철수했어요. 대원군은 이 결과를 “쇄국의 정당성”으로 내세웠어요.

신미양요 – 미국 함대와의 충돌

1868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대원군의 반양이(反洋夷) 감정은 최고조에 달했어요.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어요(신미양요). 조선군은 수적·화력적으로 열세였지만 격렬히 저항했어요.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이 전사했어요. 미국은 강화조약 체결 없이 철수했어요.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어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의하는 것이고,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어요.

실각과 강화도 조약

1873년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 민씨 세력이 대원군을 밀어냈어요. 대원군은 하야를 강요받았어요.

2년 뒤인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불법 침범했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했어요. 대원군의 쇄국 체제는 그렇게 무너졌어요.

개혁가인가, 수구파인가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요. 서원 철폐·양반 세력 견제 같은 내부 개혁은 선진적이었어요. 그런데 외부 세계와의 문을 걸어 잠근 쇄국정책은 조선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아요. 비슷한 시기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과 대비돼요.

대원군은 강화도 조약 이후에도 여러 차례 권력 복귀를 시도했고, 임오군란(1882)과 갑오개혁(1894) 때 잠시 복귀했어요. 친일 세력과 손잡기도 하고, 청나라에 납치되기도 하는 파란만장한 말년을 보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