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1948년 암살되기 전까지, 무기 하나 들지 않고 대영제국을 물러나게 하는 데 기여했어요. 비폭력(아힘사)과 불복종(사티아그라하)을 전략으로 삼은 독립운동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정치 운동 중 하나였어요.
영국 지배의 구조
인도는 1858년부터 영국의 직접 지배 아래 있었어요. 영국 동인도회사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다 세포이 항쟁(1857년) 이후 영국 왕실이 직접 통치하게 됐어요.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영국 공장제 직물에 의해 무너졌고, 인도는 영국 제조업 제품의 시장이자 원자재 공급처가 됐어요.
간디가 처음 비폭력 저항 운동을 시작한 건 인도가 아니라 남아프리카였어요. 변호사로 남아프리카에 갔다가 인종 차별을 직접 경험하고 저항 운동을 시작했어요. 1915년 인도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합류했어요.
소금 행진 – 상징이 된 저항
1930년 3월, 간디는 사바르마티 아슈람에서 출발해 아라비아 해안 단디까지 약 390킬로미터를 걷기 시작했어요. 79명과 함께 시작해 도착할 때는 수천 명이 행렬에 합류했어요. 목적은 바닷물에서 소금을 직접 만들어 영국의 소금세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어요.
소금은 모든 인도인이 쓰는 필수품이었어요. 그런데 영국은 소금 생산·판매를 독점하고 세금을 부과했어요. 간디는 이 불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으로 소금을 선택했어요. 4월 5일 해안에 도착해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어요. 이 행동이 전국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의 불씨가 됐어요.
비폭력이 효과를 낸 이유
간디의 비폭력 전략은 단순한 도덕적 선택이 아니었어요. 영국을 상대로 폭력적 저항을 한다면 군사력 차이상 질 수밖에 없었어요. 반면 비폭력 저항을 폭력으로 진압하면 영국은 국제 여론과 자국 내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됐어요.
1919년 암리차르 학살은 이 구도를 잘 보여줘요. 영국 군인이 비무장 집회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수백 명이 사망했어요. 이 사건이 영국 의회에서도 비판을 받고 국제 여론을 악화시켰어요. 비폭력 저항자에 대한 탄압은 지배자의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렸어요.
1947년 독립과 분단의 비극
2차 세계대전으로 약해진 영국은 결국 인도 독립을 받아들였어요.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독립했어요. 그러나 독립 과정에서 힌두교·이슬람교 공동체 간의 폭력이 폭발했어요.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약 1500만 명이 이동했어요.
간디는 분단을 막으려 했고 폭력에 반대했어요. 1948년 1월 힌두 극우주의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어요. 비폭력을 평생 말한 사람이 폭력으로 삶을 마쳤어요. 간디의 생애는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그대로 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