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7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했어요. 이 내각이 추진한 것이 갑오개혁이에요. 개혁의 내용은 조선 사회를 근본부터 바꾸는 것들이었어요. 그러나 외세의 강요 속에서 이루어진 개혁이었다는 한계도 뚜렷했어요.
무엇을 바꿨나
갑오개혁(1894~1896년)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어요. 핵심 내용을 보면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항목들이 포함됐어요.
가장 주목할 변화는 신분제 폐지였어요. 조선은 건국 이래 500년 가까이 양반·중인·상민·천민의 신분제를 유지해왔어요. 갑오개혁은 이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어요. 노비제도도 법적으로 없어졌어요. 물론 실질적인 신분 의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법 앞에서의 평등이 처음으로 선언됐어요.
과거제 폐지도 중요한 변화였어요. 고려 때부터 이어온 과거 시험이 사라지고, 새로운 관료 선발 제도를 도입했어요. 한자 중심의 유교 경전 암기 능력보다 실무 능력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어요.
여성과 가족 제도의 변화
갑오개혁에서 눈에 띄는 항목 중 하나는 조혼 금지와 과부 재가 허용이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남성이 죽으면 부인은 재혼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어요. 재혼한 여성의 자녀는 차별을 받기도 했어요. 갑오개혁은 이 관행을 법적으로 허용했어요.
남녀 조혼 나이도 제한했어요. 당시 관습상 어린 나이에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성 20세·여성 16세 이하 혼인을 금지했어요.
행정 구조도 달라졌어요
행정 측면에서는 기존의 6조 체제를 8아문(부)으로 재편했어요. 국가 재정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려 했어요. 도량형을 통일하고, 화폐 제도를 정비했어요. 근대 국가 운영에 필요한 행정 시스템을 만들려는 시도였어요.
사법 기능도 행정에서 분리했어요. 군수나 수령이 재판까지 담당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법과 행정을 구분하는 방향이었어요.
개혁의 한계
갑오개혁은 내용상 혁신적이었지만 방식에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어요. 일본군 점령 아래서, 일본의 의도를 반영한 개혁이었어요. 조선인의 자발적 의지보다 외세의 강제가 먼저였어요.
민중의 지지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개혁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농민들이 원했던 토지 개혁은 빠졌어요. 동학농민운동이 요구했던 부패 관리 척결도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어요.
을미사변(1895년 명성황후 시해)과 아관파천(1896년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면서 갑오개혁은 중단됐어요. 그러나 신분제와 과거제 폐지는 이후에도 복구되지 않았어요. 완결되지 못한 채 멈춘 개혁이었지만, 조선 사회를 바꾼 흔적은 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