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Boer)”는 네덜란드어로 “농부”예요. 17세기부터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유럽인들이에요. 1899년 이 보어인들이 대영제국과 전쟁을 벌였어요. 표면상 이유는 영국인들의 선거권 문제였지만 실제 이유는 금이었어요.
보어인의 역사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케이프 반도(지금의 케이프타운)에 보급 기지를 만들었어요. 이후 유럽인 정착이 이어졌어요.
1806년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차지했어요. 보어인들은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내륙으로 이주했어요(대이동, 1830-1840년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세웠어요.
금의 발견
1886년 트란스발에서 세계 최대 금맥이 발견됐어요. 비트바테르스란트 금광이에요. 유럽인들이 몰려들었어요. 특히 영국인들이 많았어요(“위틀랜더”). 이들이 곧 보어인 수를 앞질렀어요.
보어인들은 자원은 외국인에게 개방하되 선거권은 주지 않는 정책을 썼어요. 영국이 자국민 선거권을 요구하며 압박했어요.
당시 세실 로즈 같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전체를 영국 것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전쟁 (1899-1902)
1899년 10월 전쟁이 시작됐어요. 보어인들이 먼저 선전포고했어요.
처음엔 보어인이 선전했어요. 유격전에 능했어요. 자신의 땅을 알았어요. 영국군이 여러 번 패배했어요.
영국이 병력을 대규모로 증원했어요. 총 45만 명이 파견됐어요. 철조망으로 들판을 나누고, 보어 민병대의 보급을 차단하는 “지역 소개” 전술을 썼어요.
수용소
영국이 만든 집단 수용소(concentration camp)가 역사에서 이 전쟁을 기억하게 하는 이유예요. 보어인 민간인과 흑인 아프리카인을 수용소에 가뒀어요. 식량 부족, 위생 불량으로 질병이 퍼졌어요.
사망자가 최소 2만 6천 명이에요. 대부분 어린이였어요. 흑인 수용소에서도 2만 명 이상이 죽었어요.
영국 활동가 에밀리 홉하우스가 수용소를 방문하고 의회에 보고해 국제적 비난을 받았어요. 수용소(concentration camp)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왔어요. 나중에 나치가 같은 단어를 썼어요.
전후
1902년 베레니깅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어요.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이 영국 식민지가 됐어요. 1910년 영국 자치령 남아프리카 연방이 됐어요.
보어인들은 영국에 패했지만 정치적으로 살아남았어요. 이후 아프리카너(아프리칸스어를 쓰는 보어 후손) 민족주의가 자랐어요. 1948년 아프리카너 국민당이 집권했어요.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를 시작했어요. 보어 전쟁이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적 전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