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demos(민중)”와 “kratos(지배)”에서 왔어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처음 실험된 이 정치 체제는 오늘날 전 세계 정치 시스템의 이상이 됐어요.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는 지금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와 많이 달랐어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작동했고,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살펴봐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네의 정치 제도를 혁신했어요. 이전까지 아테네는 귀족 중심 정치였어요. 클레이스테네스는 혈연·지역 기반의 4개 부족제를 지역 중심 10개 부족제로 바꿨어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을 줄이고 일반 시민의 정치 참여를 넓혔어요.
도편추방제(오스트라시즘)도 도입했어요.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오스트라콘)에 써 투표하면, 가장 많이 지목된 사람을 10년간 추방할 수 있었어요. 권력 집중을 막는 장치였어요.
민회와 직접 민주주의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은 민회(에클레시아)였어요. 모든 성인 남성 시민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아래 프닉스 언덕에 모여 법률을 만들고 전쟁을 결정하고 공직자를 선출했어요. 직접 민주주의였어요.
500인 평의회(불레)는 민회의 의제를 준비하는 기관이에요. 500명을 추첨으로 선발했어요. 선거가 아닌 추첨!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공직을 맡을 수 있다는 원칙이었어요.
재판도 마찬가지였어요. 배심원단을 추첨으로 구성했어요.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재판의 배심원은 501명이었어요.
누가 배제됐나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의 “민중”은 좁았어요. 성인 남성 시민권자만 참여할 수 있었어요. 여성, 노예, 외국인 거주자(메틱)는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어요.
당시 아테네 인구 약 30~40만 명 중 실제 시민권자 남성은 3만~4만 명 정도로 추산돼요. 전체의 10~15%만이 민주주의에 참여했어요.
페리클레스의 황금기
기원전 5세기 중반, 페리클레스 시대가 아테네 민주주의의 절정이에요. 페리클레스는 공직 수당을 도입해 가난한 시민도 민회·배심원에 참여할 수 있게 했어요. 파르테논 신전이 이 시대에 완성됐어요.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문화·정치 중심이 됐어요.
그러나 이 황금기는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끝이 났어요. 아테네 민주주의는 기원전 322년 마케도니아에 완전히 종속되며 막을 내렸어요. 그러나 이 150년의 실험은 2500년 뒤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