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대항해 – 콜럼버스보다 앞선 중국의 바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87년 전, 중국은 이미 아프리카 동해안에 도달한 함대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정화(鄭和, 1371-1433)가 이끈 대항해예요. 그 규모는 유럽의 어떤 탐험대보다 훨씬 컸어요.

정화는 누구인가

정화는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본명은 마허무드였어요. 10살 때 명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어요. 환관이 됐어요. 명나라 황실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영락제의 측근이 됐어요.

영락제(재위 1402-1424)는 정화를 대규모 해외 원정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어요.

보선단 – 역사상 최대 함대

정화의 함대 핵심은 보선(寶船, 보물선)이었어요. 길이 120-140미터, 폭 50미터의 초대형 목선이었어요. 당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25미터)와 비교하면 5배 이상 큰 배예요.

1차 항해(1405)에서 배 317척, 선원과 병사 27,800명이 출발했어요. 하나의 도시가 바다 위를 움직이는 것과 같았어요.

7차례 항해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7차례 항해가 이뤄졌어요.

  • 1-3차 항해: 인도 말라바르 해안까지
  • 4차 항해: 페르시아만 호르무즈, 아라비아 반도
  • 5-7차 항해: 아프리카 동해안(케냐·탄자니아 해안)까지

가는 곳마다 현지 지도자에게 중국 황제의 권위를 인정받고, 조공 관계를 맺었어요. 귀국할 때는 각국의 사신과 진귀한 물품을 가져왔어요. 특히 기린을 데려온 것이 유명해요. 중국인들은 기린을 “기린(麒麟)” 즉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겼어요.

왜 중국은 세계를 정복하지 않았나

이 항해는 군사 정복이 아니었어요. 유럽 탐험대가 식민지 건설과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했다면, 정화의 원정은 주로 외교·무역·중국 황제의 권위 과시가 목적이었어요.

1424년 영락제가 사망했어요. 후계자들은 대항해에 소극적이었어요. 유교적 관료들은 원정 비용이 너무 크다고 반대했어요. “오랑캐와 교류할 필요 없다”는 화이관(華夷觀)도 작용했어요.

1433년 7차 항해를 끝으로 중국의 대항해는 끝났어요. 이후 명나라는 해금(海禁) 정책을 강화했어요. 보선을 만드는 것 자체를 금지했어요.

그 사이 유럽은 항해술을 발전시켰어요.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도달했고,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닿았어요.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어요.

정화의 항해가 계속됐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역사의 흥미로운 “만약에” 중 하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