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왜군 15만여 명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어요. 부산진성이 하루 만에 함락됐고, 동래성도 며칠을 버티지 못했어요.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고, 4월 30일에는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어요. 상륙에서 수도 함락까지 단 17일이었어요.
200년의 평화가 군대를 무너뜨렸어요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북방 여진족과 남방 왜구를 상대로 군사적 긴장을 유지했어요.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국경이 안정되고 내부 질서가 잡히면서 실질적인 전쟁 경험이 사라졌어요.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약 100년 넘게 대규모 전쟁이 없었어요.
이 기간 동안 조선의 군사 체제는 형식화됐어요. 병역 기피가 만연했고, 군적(군인 명부)에 이름만 올리고 실제로는 복무하지 않는 사례가 흔했어요. 군사 훈련은 형식적으로 진행됐어요. 임진왜란 당시 일선 수령들이 병력을 소집하려 했지만, 실제 전투 가능한 병사는 장부상의 숫자에 한참 못 미쳤어요.
조총이라는 전혀 다른 무기
왜군이 가져온 조총은 조선 군대에게 심리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충격이었어요. 조총은 1543년 포르투갈인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후 약 50년에 걸쳐 대량 보급됐어요.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대 약 2만 명 중 30~40%가 조총을 들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조선군의 주력 원거리 무기는 활이었어요. 조선의 각궁은 성능이 뛰어났지만, 활은 숙련에 수년이 걸려요. 반면 조총은 비교적 짧은 훈련으로 운용할 수 있었어요. 정면 돌파 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왜군의 조총 일제 사격 앞에서 조선군의 진형이 속절없이 무너졌어요.
당쟁이 전쟁 준비를 막았어요
임진왜란 직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판단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했어요. 1591년 조정이 파견한 통신사 황윤길(서인)과 김성일(동인)의 보고가 정반대였어요. 황윤길은 “왜적의 침략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했고, 김성일은 “전쟁 준비가 백성을 불안하게 할 뿐”이라며 위험을 축소했어요.
당시 조정의 주도권은 동인이 쥐고 있었어요. 결국 김성일의 보고 쪽으로 여론이 기울었고, 방어 태세 강화는 지지부진했어요. 당쟁이 군사 판단까지 왜곡한 셈이었어요.
조선이 반격에 성공한 이유
그러나 조선은 초반의 처참한 패배를 딛고 전세를 역전시켰어요. 이순신의 수군이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왜군의 식량과 무기 공급이 막혔어요.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의 후방을 괴롭혔어요. 명나라 원군도 합류했어요.
임진왜란은 초반 20일의 대패와 이후 7년의 항전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전쟁이에요. 국가 체제의 허점이 한순간에 드러난 전쟁이기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