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어떻게 이어졌나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과 강제 병합 조약을 체결했어요. 조선 왕조 500년과 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끝난 날이었어요. 이후 1945년 해방까지 35년 동안,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졌어요.

3.1운동 – 비폭력 저항의 폭발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어요. 이 운동은 학생·종교인·농민이 함께 거리로 나선 전국적인 비폭력 저항이었어요.

일제 통계로도 참가자 200만 명, 사망자 7500명 이상이었어요. 일제는 무력으로 진압했어요. 제암리 학살처럼 사람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불태운 사건도 있었어요.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세 가지 결과를 낳았어요.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꿨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조직화의 필요성이 확인됐으며,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됐어요.

임시정부와 외교 독립운동

1919년 4월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 역할을 맡았어요.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대통령)로 추대됐고, 김구가 이후 주석으로 활동했어요.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에 집중했어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하고, 미국·중국·프랑스 등에 한국 문제를 알리려 했어요. 그러나 1차 대전 승전국들은 약소국의 독립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외교 독립운동의 한계가 드러났어요.

무장 투쟁 – 만주와 연해주에서

외교로 독립이 어렵다는 현실이 확인되면서 무장 투쟁이 강화됐어요. 만주(현재 중국 동북부)와 연해주(러시아)를 거점으로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됐어요.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대표적인 승리였어요. 홍범도·김좌진 장군이 이끈 이 전투들에서 독립군은 유격전과 지형 활용으로 병력 면에서 열세를 극복했어요.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의 조선인 마을을 대규모로 학살했어요(경신참변).

항일 의거와 한인애국단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운 환경에 놓였어요. 이 시기 임시정부 산하의 한인애국단이 의거 활동을 펼쳤어요. 이봉창은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졌어요. 같은 해 4월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전승 기념식 현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고위 장성과 외교관을 살상했어요. 이 의거는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 지원에 나서는 계기가 됐어요.

광복으로 가는 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조선은 해방됐어요. 직접적인 원인은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 참전이었어요. 그러나 35년 동안 이어진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광복 이후 독립국가를 수립할 역량이 남아 있지 않았을 거예요. 독립운동은 나라가 사라진 시대에 국가 정체성을 지킨 역사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