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왜 조선 최악의 폭군이 됐나

조선의 왕들은 사후에 묘호(廟號)를 받아요. 태조·세종·영조처럼 “조”나 “종”이 붙어요. 그런데 조선 10대 왕 이융은 사후에 묘호를 받지 못하고 “연산군”으로 불려요. 왕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에요. 연산군은 조선에서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두 왕 중 하나예요.

어머니 폐비 윤씨

연산군의 비극적 삶은 어머니에서 시작됐어요. 생모 폐비 윤씨는 성종의 정비였어요.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냈다는 이유로(질투와 투기가 원인이었다고) 1479년 폐위됐고, 1482년 사약을 받아 죽었어요.

연산군이 태어난 지 5년 만에 어머니가 쫓겨났어요. 성장하면서 어머니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했어요. 성종이 살아있는 동안 신하들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어요.

무오사화 – 1498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얼마 안 돼 첫 번째 사화(士禍)가 터졌어요. 사화는 선비들이 집단으로 화를 당하는 사건이에요.

유자광이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쓴 내용을 문제 삼았어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항우에게 죽은 초 의제를 조문하는 글)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했어요.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무덤에서 꺼내 목 베기)를 당했고, 살아있는 제자들은 처형·유배됐어요.

갑자사화 – 1504년

두 번째 사화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된 뒤 일어났어요. 어떤 경로로 알게 됐는지는 불분명해요.

연산군은 어머니 사사(賜死)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찾아 처벌했어요. 이미 죽은 성종의 후궁들은 무덤에서 꺼내 처형했어요. 어머니 죽음에 관여했거나 방관한 신하들도 대거 처형됐어요.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간 내시의 자손까지 죽였어요. 갑자사화로 수백 명이 죽거나 유배됐어요.

향락과 공포 정치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본격화됐어요. 성균관을 유흥 장소로 바꿨어요. 전국에서 미녀를 뽑아 장악원(음악 담당 관청)에 채웠어요. 이들을 흥청(興淸)이라 불렀어요.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한글로 왕을 비방하는 글이 돌았어요. 연산군은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한글 인쇄 도구를 부수게 했어요. 신하들이 간언하면 처형했어요. 사냥터를 넓히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기도 했어요.

중종반정 – 1506년

결국 신하들이 들고일어났어요. 1506년 박원종·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켰어요.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됐고 그해 11월 31세에 사망했어요.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했어요.

연산군이 폭군이 된 데는 개인적 트라우마(어머니 죽음)와 왕권의 절대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맞물렸다고 봐요. 그를 가르치고 견제해야 할 사람들이 제 역할을 못 한 측면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