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약 100일 동안 아프리카 작은 나라 르완다에서 약 80만-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하루 평균 8,000명이에요. 나치 홀로코스트보다 빠른 속도였어요. 총이 아니라 칼과 도끼로 이웃이 이웃을 죽였어요.
후투와 투치
르완다의 두 민족 후투와 투치는 사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해요. 전통적으로 농업을 하면 후투, 목축을 하면 투치로 구분하는 정도였어요.
1884년 르완다가 벨기에 식민지가 됐어요. 벨기에는 “분류해서 지배한다”는 방식을 썼어요. 키가 크고 코가 높은 투치를 우월 인종으로 규정하고 지배 계층으로 삼았어요. 심지어 신체 특징으로 측정해 신분증에 민족을 표시했어요. 이게 나중에 학살의 도구가 됐어요.
1962년 독립 후 다수 민족 후투가 권력을 잡았어요. 투치에 대한 차별과 학살이 여러 차례 있었어요. 투치 수십만 명이 우간다 등 주변국으로 피신했어요.
화염의 씨앗
1990년 우간다에서 르완다 투치 망명자들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르완다를 침공했어요. 이후 내전과 협상이 반복됐어요.
후투 강경파는 학살을 계획적으로 준비했어요.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 투치를 “바퀴벌레”라고 불렀어요. 민병대 인테라함웨를 조직하고 마체테(칼)를 대량 수입했어요.
1994년 4월 6일
4월 6일 저녁, 후투 대통령 하비아리마나가 탄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 근처에서 격추됐어요. 누가 쐈는지는 여전히 논쟁이에요. 어쨌든 이 사건이 방아쇠였어요.
다음 날 아침부터 학살이 시작됐어요. 군인과 민병대가 신분증의 민족 표시를 확인해 투치를 죽였어요. 교회와 학교에 숨은 사람들도 죽였어요.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일이 전국에서 벌어졌어요.
국제사회의 외면
유엔 평화유지군이 르완다에 있었어요. 지휘관 로메오 달레르 장군은 학살 직전 무기 창고 위치 정보를 입수해 본부에 보고했어요. 유엔은 선제 행동을 금지했어요.
학살이 시작되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국민을 대피시켰어요. 유엔은 평화유지군 숫자를 오히려 2500명에서 270명으로 줄였어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나중에 르완다에 개입하지 않은 것을 재임 중 가장 큰 실책으로 꼽았어요.
학살의 끝과 이후
1994년 7월 RPF 투치군이 르완다 전국을 장악하면서 학살이 끝났어요. 이제 권력은 투치가 쥐었어요. 후투 200만 명이 주변국으로 탈출했어요. 이 피난민 캠프에서 새로운 분쟁이 이어졌어요.
현재 르완다는 폴 카가메 대통령 아래 경제 성장 중이에요. 신분증의 민족 표시는 삭제됐어요. 그러나 26만 명이 학살 관련 재판을 받았어요. 상처는 깊어요.
르완다 학살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했던 홀로코스트 이후 50년 만에 일어난 집단 학살이에요. 국제사회의 불개입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는지 보여주는 역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