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 3일 만에 끝난 개혁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조선 최초의 우편 관청) 개국 축하연이 열리고 있었어요. 이 자리에서 불길이 치솟았어요. 신호였어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가 미리 짜둔 계획을 실행했어요. 고종을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했어요. 갑신정변의 시작이었어요.

조선을 바꾸려 한 사람들

개화파는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았어요.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조선도 낡은 청나라 의존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근대화해야 한다고 봤어요.

김옥균(1851~1894년)이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어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며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직접 목격했어요. 조선도 신분제 폐지, 재정 일원화, 근대적 군사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민씨 척족 중심의 수구파에게 번번이 막혔어요.

3일 천하

갑신정변 다음날 개화파는 14개조 혁신 정강을 발표했어요.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 청산, 신분 차별 폐지, 재정 일원화(혜청에서 관할), 경찰제도 도입 등 파격적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혁명은 3일을 버티지 못했어요. 고종과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 1500명이 개입했어요. 개화파를 지원하기로 했던 일본군 150명은 청나라 군대 규모에 밀려 철수했어요. 12월 6일, 청나라 군대가 경우궁을 공격하자 개화파 정권은 무너졌어요.

이후 – 김옥균의 망명과 죽음

주동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어요. 갑신정변에 참여했거나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은 조선인 수백 명이 처형됐어요. 개화파의 가족까지 연좌제로 피해를 입었어요.

김옥균은 일본에서 10년 망명 생활을 하다 1894년 상하이에서 조선 자객에게 암살됐어요. 시신이 조선으로 돌아와 능지처참됐어요.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의 자주적 개혁 가능성은 크게 좁아졌어요. 이후 청일전쟁(1894년)·을미사변·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조선은 결국 주권을 빼앗겼어요.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신분제 폐지와 근대 제도 도입이라는 방향 자체는 10년 뒤 갑오개혁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