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어요. 그 순간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수개월간 만세운동이 이어졌어요. 3.1운동은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독립운동이에요.
불꽃의 배경 – 두 가지 기폭제
3.1운동이 갑자기 터진 건 아니었어요. 오래 눌려온 분노가 두 가지 계기를 만나 폭발했어요.
고종의 죽음: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고종이 갑작스럽게 죽었어요. 독살 의혹이 퍼졌어요. 일본이 나라를 빼앗더니 황제까지 죽였다는 분노가 조선인들 사이에 들끓었어요.
민족자결주의: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각 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어요. 조선 지식인들은 이를 조선 독립의 국제적 명분으로 삼았어요.
민족대표 33인과 독립선언서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모였어요.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손병희 등 33명이 서명했어요. 이들을 민족대표 33인이라 불러요.
독립선언서는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해요. 폭력 없는 평화 독립을 강조했어요.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대신 태화관(음식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스스로 경찰에 신고했어요.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전국으로 – 두 달간의 함성
탑골공원의 만세는 들불처럼 번졌어요. 3월 한 달 동안 조선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어요. 도시에서 시골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퍼졌어요.
일제 통계로도 참여자가 100만 명을 넘었어요. 실제로는 20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해요. 시위 건수는 1,500건 이상이었어요.
일제의 탄압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어요. 경기도 수원 제암리 사건이 대표적이에요. 일본 헌병이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어요. 30명 이상이 불에 타 죽었어요.
공식 통계로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5,000명, 체포 46,000명이에요. 실제 피해는 훨씬 클 거예요.
3.1운동이 바꾼 것들
3.1운동 이후 일제의 조선 지배 방식이 달라졌어요. 무단통치(헌병 경찰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했어요. 조선어 신문 발행을 허용하는 등 외형적 유화 정책을 썼어요. 실질적 억압은 계속됐지만 방식이 달라졌어요.
국내외 독립운동도 체계화됐어요.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어요. 3.1운동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에 직접 연결돼요.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어요.
매년 3월 1일이 공휴일(삼일절)인 이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