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 19세기 조선의 민중 봉기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강제로 만석보(저수지)를 쌓게 하고 물세를 거둔 사건이 도화선이 됐어요. 농민들이 군청을 습격하고 관리를 쫓아냈어요.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어요. 이 봉기는 전라도를 넘어 전국으로 번졌고, 결국 조선 역사를 바꾼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계기가 됐어요.

수탈 구조가 한계에 달했어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는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있었어요. 세도정치 이후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졌어요. 농민들은 법정 세금 외에 각종 명목의 잡세를 내야 했어요.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가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현실이었어요.

게다가 19세기 말 조선은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쌀을 대량으로 사들여 수출했어요. 쌀값이 오르면서 가난한 농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렸어요.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어요.

전봉준과 동학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은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라 불렸어요. 그는 동학(천도교의 전신)의 교세를 조직 기반으로 활용했어요.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 사상을 내세웠어요.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이 하늘이라는 생각은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강한 호소력을 가졌어요.

1894년 4월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이 정부군을 격파했어요. 전주성까지 점령했어요. 다급해진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어요.

청일전쟁으로 번지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보냈어요. 두 나라 군대가 조선 땅에 동시에 들어온 거예요. 전봉준은 외세 개입을 막기 위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농민군을 해산했어요.

그러나 일본은 물러가지 않았어요. 1894년 7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세운 뒤 청나라를 공격했어요. 청일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전쟁은 조선 땅에서 벌어졌지만 조선은 주체가 아닌 무대였어요.

재봉기와 우금치 전투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해지고 일본군의 조선 내 만행이 이어지자, 농민군이 다시 일어났어요. 10월 재봉기였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근대식 무기와 정부 관군이 합세했어요.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어요. 일본군의 게틀링 기관총 앞에 죽창을 든 농민군이 무너졌어요. 전봉준은 이듬해 체포돼 처형됐어요. 동학농민운동은 패배로 끝났지만, 그 요구였던 신분제 폐지와 부패 척결은 갑오개혁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됐어요.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이끌어낸 역사였어요.